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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한국역사에서의 대한제국시대

by 모두의 pet 2023.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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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에의 대한제국시대

  한국역사에서 대한제국시대는 1897년 10월 12일 고종이 환구단을 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국호를 대한국, 연호를 광무로 지정하고 초대 황제로 즉위합니다. 고종은 1882년부터 사용해 온 태극기를 국기로 지정하고 국장을 이화문으로 하였으며, 애국가를 구가로 정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은 독립과 자주성을 한층 더 강하게 주장하기 위해 사용되는 의례적이고 의전상 칭호로 대한제국의 이름은 대한입니다. 대한이라는 말은 삼한에서 유래되었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 전역에 삼한이라 불리다가 삼한이 통일되었다는 의미에서 대한이라고 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이미지

 

대한제국시대의 건국 배경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내정 간섭과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 외세가 국가의 독립을 크게 위협하면서 독립국가 수립을 바라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졌습니다. 대한제국은 독립협회가 고종의 궁궐 반환을 요구하고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면서 성립되었습니다.

 1897년(광무 원년)2월 20일 고종은 경운궁으로 돌아와 그 해 8월 17일 광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하여 10월 3일 황제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고종은 국내외에서 자주 의사를 표명하고 땅에 떨어진 나라의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제국이어야 한다고 판단하여 10월 12일 상제로 즉위합니다. 대한제국이 선포되었을 때 각국은 대한제국을 직간접적으로 승인했습니다. 이 가운데 러시아제국과 프랑스는 국가원수가 직접 승인, 축하하였고 영국, 미국, 독일은 간접 승인 의사를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대부분의 열강들이 대한제국 수립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고종 즉위 직후인 11월 12일 명성황후 국장을 지내고 과거 청나라 사대주의 상징인 영은문을 철거하고 그 부지 내 독립문 건설을 추진합니다. 

 

 대한제국 성립까지 동맹을 맺고 있던 독립협회와 수구파는 정부 형태의 문제로 충돌했습니다. 독립협회는 영국의 입헌군주제를 주장했고 수구파는 전제군주제를 주장했습니다. 독립협회는 국민참정권을 주장하기 위해 인민대표대회를 열고 국회 설치를 요구하지만 수구파와 위정척사파는 독립협회와 국회 설치를 반역죄로 규정했습니다. 독립협회와 수구파의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수구파는 입헌군주제를 계속 추진하여 1898년 11월 중앙위원회 개편을 발표했습니다. 그 결과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된 일본제국이 수구행정의 참여와 독립협회의 운동 탄납을 권고합니다. 1898년(광무 2년) 12월 보부상들이 주도한 황국협회는 만민공동회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불법화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서구화와 현대화를 목표로 한 광무개혁을 시행하였고 이에 산업혁명의 후발주자로 참여했습니다. 대한제국인 1897년 처음 공포한 '무게 및 측량에 관한 법률'에 따라 당시 통일되지 못했던 기준이 하나로 통일되게 만들었습니다. 같은 해 대한제국 정부는 서양식으로 소유권제도를 현대화하기 위한 지적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이번 개혁은 토지세 개혁과 관련이 있으며, 한국화폐 제도 개혁을 담당한 이용익이 토지세개혁을 담당했습니다. 지적 조사를 실시한후 토지를 정확하게 측량한 토지 지도가 발행 되었습니다. 하지만 러일전쟁의 발발로 토지개혁은 중단되게 됩니다. 

 대한제국은 도시에 산업인프라를 정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1898년 한성전기가 설립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1896년 첫 전화가 도입되었고, 6년 후인 1902년에 처음으로 장거리 공중전화가 개통되었습니다. 1899년 대한제국 정부 아래 서북철도국이 설립되었습니다. 또 광무개혁시기에 산업진흥정책도 추진되고 있었습니다.

 

대한제국에 일본 영향력 강화와 멸망

 대한제국은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이후에 멸망하게 됩니다. 일제는 러일전쟁 당시인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행하였고, 1904년 8월 22일(광무 8년) 제 1차 한일협정을 강행하여 대한제국 내정을 간섭하였습니다. 

 이때 고문으로 들어온 메가타 다네타로가 이른바 '화폐정리사업'으로 대한제국 자본시장을 무너뜨렸고 일본제국 외교고문에 임면된 미국인 더럼 스티븐슨은 일본의 침략의도를 미화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스티븐슨은 이후 미국 오클랜드역에서 장인환과 전명운 의사에게 처형되었습니다. 

 1904년 한반도와 만주의 패권을 둘러싸고 러일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러일전쟁은 1905년 일본 제국과 러시아의 포츠머스 조약 체결에 의해 종결되었습니다. 1905년 11월 17일 일제는 일방적으로 제2차 한일협정 수립을 선언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국감찰총감을 설치하였습니다.

 그 결과 일본제국의 침략을 규탄하기 위해 귀족과 지식인들 중심으로 한 제2차 한입협약 폐지를 주장하는 움직임이 강했습니다. 또한 독립협회가 해체된 후 헌법연구회 등 계몽자주연구와 다양한 단체를 설립하여 친일단체 일진회에 맞서 대항합니다. 초기에는 일제의 황무지 재생권 요구를 좌절시키고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기 위해 설치된 안전보장이사회와 헌정요구회 활동이 두드러졌습니다. 또 여러 애국적 계몽 운동은 교육, 언론 활동을 이용한 기술 육성을 목적으로 했습니다. 1907년(광무 11년) 2월 김광재와 서상돈이 제안한 국채보상운동이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대한제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기 위해 일제가 지원한 1300만 원의 융자금을 갚기 위해 시작되었는데, 이 애국계몽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은 통감부에 의해 중단되고 진압되었습니다.

 이러한 국가주권보호운동의 상당수는 민족독립이념과 전략을 제시하고 장기적인 민족운동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침략과 군사, 정치잭 지배에 있었던 상황에서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업었습니다.

 러일 전쟁으로 일제와 러시아 제국의 권력투쟁이 끝나고 1905년 11월 17일 제2차한일협정으로 일제에 외교력을 빼앗겨 버립니다. 이에 고종은 이 협약은 불법임을 알리기 위해 1907년 4월 헤이그에 특사를 보냈지만 일제에 의해 발각되어 7월 20일 퇴위되어 순종이 일본에 의해 즉위하게 됩니다. 

 일본은 순종이 즉위하자 한일신조약에 강제서명을 시키고 대한제국 정부 각 부처에 일본차관을 두는 등 대한제국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했습니다. 또한 일본은 한국에서의 토벌작전을 통해 전국적인 의병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마침내 1910년 8월 22일 일제가 한일병탄조약을 체결하고 8월 29일 공포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가주권이 박탈되었습니다. 조약에 서명하자 한국 역사상 마지막 군주국인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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