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에서의 동학농민운동
한국역사에서의 동학농민운동은 단순한 농민봉기 운동이 아닌 우리나라 역사의 민족정신의 근본이 되는 매우 중요한 운동이다. 동학농민운동 이후 일제강점기의 3.1 운동과 민족독립운동. 군사정권 민주화항쟁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지금의 우리나라 민주주의 정신에도 잘 흡수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떠한 외세의 탄압이나 억압에도 굴복하지 않고 정의롭고 옳은 행동을 할 수 있는 용기, 이것이 바로 동학농민운동의 기본 정신임을 알 수 있다.

동학농민운동의 봉기 배경
동학농민운동 봉기 배경은 1892년 조병갑이란 사람이 전봉준이 살던 고부군으로 군수로 오면서부터 시작합니다.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을 분만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차 없이 처벌했습니다. 전라도 고부는 원래 비옥한 땅으로 저수지가 하나만 있으면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조병값은 농민들에게 저수지 건설을 강요하고 수도요금을 받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음란한 죄, 일관성 없는 범죄 등 각종 범죄로 벌금형을 백성들에게 부과하였습니다.
조병값은 부친 선정과 비석 건립 비용을 고부군 주민들로부터 받기위해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조병갑은 농민들로부터 천냥의 돈을 받아 비석을 세우는 한편 백성들에게 각종 범죄를 덮어씌워서 벌금 2만 냥을 부과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또한 대동미 대신 돈을 모아 쌀 700석을 구해 만석포라는 저수지를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조병갑은 중앙정부에 뇌물을 주었습니다. 중앙에 대한 뇌물공여는 이 당싱 매우 의례적인 것이었으며 이러한 뇌물을 바치지 못하는 군수, 현감, 부사, 관찰사들은 자신의 자리를 내놓거나 파직당해야 했습니다.
주민들의 불만은 시간이 갈수록 더 가속화되었습니다. 여기에 조병갑의 폭정이 악화되자 전봉준의 아버지이자 훈장은 농민들의 요청에 따라 탄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 그러나 조병갑은 탄원서를 제출한 대표를 붙잡아 감금하고 고문하는 방식으로 농민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이후 전라북도 관찰자에게 청원서를 보냈지만 아무런 답변도 없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고문으로 인해 전봉준 아버지는 한 달 만에 죽고 농민들은 결국 군수를 무력으로 몰아내야 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전봉준을 비롯한 고부에서 반란을 일으킨 동학 농민군은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을 내세우고 전라도 지역을 공격한 후 전주를 점령했습니다. 조정은 위기감을 느끼고 청나라에 증원을 요청했고, 이런 구실로 일본군은 자신들의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함께 군대를 파견하고자 합니다. 이를 막으려고 농민군과 조정은 전주성에서 전주화약을 맺습니다.
농민군은 조정에 12건의 폐지 개혁안을 제안하고 산발적으로 집강소를 설치하였고 조정도 중앙에 교정청을 설치해 개혁을 실천하게 됩니다. 그러나 난이 정리되었다는 조정의 말을 무시한 일본은 조선궁전 경복궁으로 급습해 불법 점거했습니다. 농민군은 다시 일어나 외세를 몰아내고 서울로 향했습니다. 먼저 공주를 점령하려던 농민군이 근대 무기로 무장한 정부군와 일본군의 협력으로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하고 동학농민군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실패하게 됩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의의
동학농민운동은 최재우가 창시한 동학을 기반으로 한 농민중심의 봉기가 그 의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학은 조선 후기의 혼란스러운 농민들이 신분제를 타파를 외쳤기 때문에 의지할 수 있는 종교였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은 간단하게 '반봉건 반외세적 농민봉기'인 농민이 주도하는 운동이며 조선시대 지배층에 대한 최대 항의다. 청조와 일본의 개입으로 실패했지만 나중에 3.1 운동에 의해 계승되었습니다.
동학농민전쟁은 동학이라는 종교단체이며 동학민이 주도하는 농민반란이라는 점에서 이전 과는 달리 외세를 배제하려 한 것도 처음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역사적 조건 하에서 동학농민운동을 몇 가지 한계가 있었습니다.
첫째, 농민군은 조선 정부군을 넘어 외국의 개입에 대항하기 위한 효과적인 무기과 병력이 부족했습니다. 둘째, 농민 중심의 동학군에 대한 지주와 부유층, 기득권을 가진 농촌사회의 민보단을 통한 저항을 과소평가 했습니다. 셋째, 사회개혁을 위한 혁명을 수행하면서 대원군에게 의존하려 한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아울러 동학군 과격파가 조선왕조를 부정하고 새 정부를 수립하려 했으나 온건판 전봉준 등이 흥선대원군에게 협조한것도 동학군 내부에서 합의하지 ㅇ낳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전봉준이 백산에서 전라감사에게 개혁을 요청하고 전주화약을 맺기 직전 관군 최고사령관 홍계훈에게 보낸 청원서에는 대원군의 정권 복귀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운동은 애국심과 애정의 동기에서 일어난 조선 후기 농민 중심의 최대 규모의 봉기였습니다. 반면 농민군이 현대 민주주의, 사회주의를 겨냥한 사회혁명과 계급전쟁을 꿈꿨다는 역사학자들의 견해도 있습니다.
결국 동학농민운동은 단순하고 애국적인 농민들의 자기생존을 위해 필사의 투쟁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실패의 경험을 바탕으로 농민들의 항일애국정신이 다음 시기 의병활동에 영향을 끼쳤으며 농민들의 내부 개혁 요구는 갑오개혁에도 일부 반영되었습니다. 반영된 내용으로는 과부 외출 허가와 신분제 폐지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의 희망인 토지개혁이 없었기 때문에 이 개혁은 큰 지지를 얻지 못했습니다. 김계남, 전봉준 등 일부 과격파가 흥선대원군과 소통한 점도 국민에게 부정적인 시각을 주고 큰 지지를 얻지 못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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