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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한국역사의 조선시대 후기-2부

by 모두의 pet 2023.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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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의 조선시대 후기-2부

 한국역사의 조선시대 후기  2부에서는 세도정치에서 부터 대한제국 전까지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외친족의 권력정치로 인한 사회적 혼란인 계속되면서 순조 1812년 홍경래가 반란을 일으키고 철종 때는 진주민란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조정에 대한 내란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몰락 귀족 홍경래의 주도로 수많은 몰락 농민과 소농이 참여했습니다. 한때 청천강에서 의주까지 넓은 지역을 장악했으나 정부군에 의해 패하게 됩니다.

조선시대궁궐이미지

 

 조선시대 후기 흥선대원군 섭정

 조선시대 후기 철종에 이어 흥성대원군 아들 고종(1863~1907년) 임금이 흥선대원군이 되어 섭정하게 됩니다. 그는 잃어버린 왕권을 회복하고 국난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래서 집권하자마자 안동 김씨 가문의 세습 정권을 가장 먼저 무너뜨린 인물입니다. 그리고 국민들의 비난을 받던 세제를 개편하게 됩니다. 가장 문제가 된 환곡제도를 사창제로 전화하였고 양반에게 군포를 부과하는 군포제도를 시행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군복무제를 개정하였습니다. 또한 붕당의 온상으로 여겨지던 서원이 산약서원을 제외하고 대부분 폐지되어 유학자들이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비변사를 폐지 수준으로 축소하여 의정부와 3군의 기능을 회복하였고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법전을 개편합니다.

 

 흥성대원군은 왕권이 강화되어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재정난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파괴된 경복궁을 재건하는 데 재정이 투입되었습니다. 경복궁의 재건뿐만 아니라 의정부, 종묘, 종친부, 육조시대 각 관청과 북한산성의 수축도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황폐해진 한양은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지만 한양 재건 과정에서 세금으로 인한 초인플레이션과 강제노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흥선 대원군은 천주교를 강력히 탄압했습니다. 조선에서 수천명의 프랑스 사제와 천주교 신자들이 병인박해로 처형되었습니다. 성직자가 살해된 프랑스는 강화도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프랑스는 조선에 사과와 손해배상, 무역 통상을 요구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강화도를 점령하고 서울러 진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한국군은 프랑스의 진격을 저지했고 프랑스 군은 수많은 재산과 의궤들을 약탈하고 철수하였습니다. 

 

 5년 후인 1871년 미국은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미국은 1866년 미국 상인이 대동강에서 소란을 일으켜 배를 태운 사건(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진상에 의문을 가졌습니다. 이어 조선의 사과와 배상, 무역협상 등을 요구했고 흥선대원군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미군은 강화도를 공격해 이를 방어하던 한국군을 모두 섬멸하고 본토로 귀환합니다.(신미양요) 미국과의 전쟁이 끝난 뒤 대원군은 서양과의 무역협상을 비난하는 척화비를 세우게 됩니다. 흥선대원군 시절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하지 못하고 무역관계를 거부하는 강경한 정책(폐쇄정책) 때문에 서방과의 외교관계 수립을 제대로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정책들을 전통적인 통치체제를 재정비하여 일시적인 안정을 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전통적인 체제 안에서의 개혁이 무모함으로 나타나 조선의 문호개방 시기를 놓치게 됩니다. 

 

제국주의 서구 열강들의 침략

 제국주의 서구 열강들의 침략은 흥선대원군의 실각 후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됩니다. 1873년 고종이 음력 11월 자신의 친정을 선포하자 10년간 집권했던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명성확후를 중심으로 한 여흥 민씨 정권이 수립되었습니다. 그 결과 무역 계몽주의자들이 등장하고 조선의 대외 정책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과의 평화협상을 포기한 일본은 1875년(고종 12년) 9월 20일 강화도에 불법 입국하여 무역조약을 체결하고 강화도 주둔지에서 교전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강제로 조선의 개항을 강요했습니다. 이에 조선에서는 찬반양론이 엇갈렸으나 결국 개항 찬성자들의 입지가 강화되어 1876년 2월 3일에는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문호를 개방하게 됩니다.

 이로써 국교단절정책을 펼치던 좃너이 부산, 인천, 원상항을 개항하게 됩니다. 이 조약을 체결한 이후 일본군은 점차 한국에 침투하여 위협과 기만을 일삼았고 1910년 한국의 주권을 빼앗았습니다. 이후 고종은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 김홍집이 귀국하면서 가져온 <조선책략>이란 책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조선왕조는 부국강병을 목표로 개화된 인물들을 모집하고 개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 후 신사유람단이 일본에 파견되고 청나라에 여선사를 파견합니다. 

 

 정부는 계몽정책을 전문으로 하는 조직인 통리기무아문을 설립하고 군제도를 개혁하여 새로운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했습니다. 1880년 10월 11일에 미국과 국교를 수립하고 이어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서방 열강과의 외교관계를 설립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체결한 조약은 모두 치외법권을 규정하고 국내 산업에 대한 보호가 거의 없는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계몽정책과 관련하여 보수적인 유학자들은 성리학적 전통질서를 지키고 외세를 배척하기 위해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 운동은 외국의 침략을 막기 위한 반외세주의 운동이었지만 전통적인 사회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노력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생들 가운데 일부 혁신적인 인사들은 유교문화를 계승하면서 서양의 물질문명을 부분적으로 수용한다는 동도서기론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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