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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한국역사의 조선시대 후기-1부

by 모두의 pet 2023.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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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의 조선시대 후기

 한국역사의 조선시대 후기는 1637~1897년까지로 볼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 정치는 붕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17세기 중엽 예송논쟁으로 서원이 마침내 남인에게 권력을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나 남인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권력을 잡은 뒤 서서로 무너지게 되면서 서인에게 철저하게 탄압을 당하게 됩니다. 

 그 후 서원에서 분열된 노론과 소론은 격려하게 반대했습니다. 그 결과 조선시대에는 한쪽이 다른 쪽을 몰아내는 일당독재가 발생하고 자주 돌아오는 기괴한 사건이 반복되었고, 영조와 정조는 당의 균형을 고려하여 인적자원을 골고루 등용하기 위해 탕평책을 실천하게 됩니다. 19세기에는 안동김 씨, 풍양조씨 등 외북세력의 권력정치에 의해 순조, 헌종, 철종 3대가 60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조선시대 건출물 이미지

 

조선시대 후기의 전쟁 병자호란 

 사림파의 지원을 받아 즉위한 인조는 다시 명나라와 우호적인 정책을 펴 1672년(정묘호란)과 1636년(병자호란) 청나라가 두 차례나 조선을 침공하게 됩니다. 조선은 전쟁에서 패했고 인조는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를 거행했으며 소현왕자와 봉림왕자, 그리고 조선의 많은 사람들을 인질로 잡혀갔습니다.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군신관계가 확립하게 됩니다. 한편 조선사회 자체의 모순과 분열적 대립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국토는 황폐화되고 국가재정이 고갈되면서 국민들은 비참한 삶을 살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고 있던 조선은 비밀리에 방어 강화에 힘쓰고 청나라에 복수하겠다는 의도로 북벌을 은밀히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효종은 송시설, 이완 등 주전파들을 등용하여 군사를 훈련시키고 산성을 보수하는 등 북벌을 대비하였습니다. 이로써 4만 5천 명의 군사력이 창설되었습니다. 이 북벌은 1659년 효종이 사망하면서 사실상 종료되었습니다. 

 현종과 숙종은 잠시 서인을 거부했으나 결국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과 정치를 함께 하게 됩니다. 또한 서인을 중심으로 청나라의 상황 변화를 점검하고 북벌 움직임이 다시 제기되었으나 효종 때와는 달리 일시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사실 북벌은 어렵다는 판단으로 보류되었고 결국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습니다. 

 

 이후 북벌은 병자호란 패배에 책임져야 했던 서인들이 책임을 회피하고 한국인들의 정치적 진보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바뀌었습니다. 한편 북벌은 전후 민심 수습과 국방강화에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외부세계와의 단절을 초래하고 조선사회의 후진성을 가속화시켰습니다. 청나라는 당시 중국을 지배한 후 국력을 대폭 확대하여 화포, 자명종, 만국전도 등 서양 문화를 받아들여 문화국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무조건 청나라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유익한 것을 배우는 북학론이 대두되었습니다. 

 

조선시대 후기의 탕평정치

 조선시대 후기의 탕평정치는 영조와 정조 때 굉장히 잘 쓰여집니다. 영조 즉위 당시 정조는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과 그들을 몰아내고 다시 권좌를 되돌리려는 소론으로 나뉘어 서로 죽이고 살해하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영조는 탕평을 통치이념으로 채택하고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를 동원하여 당쟁을 타파하였습니다. 영조는 한 사람을 등용하면 다른 입장에서의 인물을 등용한 쌍거호대를 실시하여 탕평정책을 펼쳤습니다. 

 영조의 노력으로 탕평정치는 손자 정조로 이어집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과 이를 둘러싼 시파와 벽파의 갈등을 겪은 정조는 영조의 탕평에 대한 정치적 의지를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이는 당시 대관을 이용해 상대 지도자를 공격하는 파벌의 전통적 관행을 없애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또 당시 붕당 조성의 주요 통로였던 인사권을 임금이 직접 개입하면서 당의 영향력을 줄이고 조정 주도권을 왕이 차지했습니다. 법원에서 장관이 파벌을 지적하거나 당파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해 파벌의식 자체를 없애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조 때에는 노론, 소론, 남인, 소북의 사색당파가 보편화되었습니다. 

 

 또한 규장각은 붕당의 확대를 막고 왕의 권력과 정책을 지원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되었습니다. 또한 그 자신도 초월군주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를 양성하고 재훈련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중하급 공무원 가운데 청년과 신진인물을 재교육하기 위한 초계문신제가 시행되었습니다.

 

조선시대 후기의 세도정치의 전개

 조선시대 후기의 세도정치는 정조대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시작되었고 그로 인해 조선사회가 쇠퇴하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1800년 정조가 급사하고 어린 아들  순조(1800~1834년)가 즉위하자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안동 김씨의 치세가 시작됩니다. 이후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외부세력의 세도정치가 60년 이상 지속되면서 3대째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순조, 헌종(1834 ~ 1849년), 철종(1849 ~ 1863년). 영조와 정조의 탕평정책으로 한때 약화되었던 당쟁과 일당독재는 정조의 뒤를 이어 특정 가문의 권력을 독점하는 세습정치로 변질되었습니다. 이는 선조 이래 오랫동안 조선 정치권력의 기본구조였던 붕당정치가 완전히 붕괴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순조 때 권력을 잡은 안동 김씨들은 헌종이 즉위할 때 풍양 조 씨 가문에 잠시 권력을 부여했으나 철종이 즉위하자 권력을 되찾아 얻기도 했습니다. 60년간 이어진 세도정치의 영향으로 왕권이 한없이 약해지면서 국민은 물론 왕실까지 안동 김씨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기형적인 정치 형태인 세도정치가 온갖 비리를 저지르고 있고, 전정과 군정, 환곡등 이른바 삼정의 문란이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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