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의 후삼국시대
한국역사의 후삼국시는 통일신라와 백제, 고구려의 부흥으로 이루어져 역사학적으로 후백제와 후고구려로 알려져 있습니다. 9세기말 신라가 쇠퇴하고 백성들에게 막대한 세금이 부과되자 전국적으로 반란이 일어나 강력한 지방 영주들이 쇠퇴하는 왕구에 맞서 봉기가 일어날 시대를 말합니다.

후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의 멸망 시작
후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왕국(서기 668~935년)은 3세기에 걸쳐 한반도를 지배해 왔지만 국가의 멸망은 점차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골품제도에 기초한 계급 구조의 경직성은 태생적 지위를 넘어서는 것은 거의 없음을 의미하며 사상이나 혁신이 억압되고 창의적이고 능력 있는 인물들이 나오지 매우 어려운 구조였습니다. 귀족계급은 왕의 권력과 낭비에 분개하기 시작했고 지주는 중앙집권적인 지배에 저항하기 시작하였고 농민들은 그들에게 부과된 끊임없는 세금에 점점 저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국가는 내부에서부터 붕괴되고 있었습니다.
신라 중앙정부의 약점은 최고 시기에 항상 국가통제를 받기 어려운 지방귀족과 강자들이 이제 자신들의 영토를 중앙정부의 간섭 없이 스스로 통치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후삼국시대에서 견훤과 궁예
후삼국시대(서기 889년 ~ 935년)는 정치적 혼란의 시대였고 이 시대에 견훤과 궁예라는 인물이 두곽을 나타내었습니다. 농민의 지도자이자 신라군 장교였던 견훤(867~936년)은 서기 892년 정치적 불안을 틈타 무주 총독에 취임했습니다. 서기 900년에 이르러 견훤은 더욱 야심이 크게 되었고, 도적 양길과 함께 반도 남서부 백제 왕국의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수도로 완산(현재 전주) 선택했습니다.
한편 901년 귀족 불교 승려 궁예가 후고구려로 알려진 북쪽의 새로운 고구려 국가를 선언하였습니다. 궁예는 기록에 따르면 신라 경문왕의 서자나 신라 허안의 자식 중 한명라고 합니다. 그 역시 양길과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오히려 무자비함이 증명되어 도적을 죽이고 자신의 권리로 왕으로 선언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열여준 것이었습니다. 그의 수도는 처음에는 송악(현재 개성)이었고, 다음으로는 철원이었습니다. 또 왕국의 이름을 두 번 변경해 서기 904년 마진, 911년 태봉이라고 이었습니다. 하나도 변하지 않는 것은 궁예의 신라에 대한 미움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그의 백성들로부터 신라를 '저주받은 자의 나라'라고 부르게 할 정도였습니다.
그 후 반도를 지배하기 위한 어랜 권력 투쟁이 계속되었습니다. 기원전 927년 견훤은 신라 수도 경주를 공격하여 위협하였으며 궁예 또한 신라 북부와 정부까지 차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안정기에 들면서 궁예, 견훤 둘 다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궁예는 권력과 광신적인 폭정으로 인해 백성들의 손에 걸려 죽임을 당하였고 견훤은 사람의 아들에 나라를 뺏기고 쫓겨나게 됩니다.
특히 궁예는 권력에 취해 자신을 살아있는 부처, 미륵불이라고 믿고 경전을 엮는데 시간을 보냈고 호화로운 옷을 입으며 200명의 승려들이 그의 뒤를 수행하며 사치를 하였습니다. 그는 마음을 읽을 힘이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기술을 사용해 불성신한 의도가 의심되는 사람을 가차 없이 죽였습니다. 서기 918년, 최초의 대신인 왕건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왕건은 후고구려의 사령관으로 두각을 나타내 여러 지역을 점령하여 중국과 일본 등과도 무역을 하였습니다. 왕건은 고려라는 새 이름을 선택하고 그의 아버지가 오랫동안 부유한 상인으로 지내면서 키웠던 송악(지금 개성)으로 도읍을 정했습니다.
후삼국시대에서 왕건의 한반도 통일
후삼국시대에서 한반도의 통일은 왕건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후백제는 서기 920년과 924년에 신라를 공격하였습니다. 지금은 삼국 중 가장 약하고 깊은 남쪽의 작은 심장부만을 지배하고 있는 신라는 후고구려에 도움을 청하여 응수하였습니다. 백제가 927년 신라의 수도 경주를 공격해 약탈하자 신라 경애왕(924~927년)은 자살하고 꼭두각시 지배자인 김부가 경순이란 이름으로 왕이 됩니다. 왕건은 후백제의 지도부 내부의 혼란을 이용하면서 후백제 수도를 공격하여 대응했습니다. 이를 수비하기 위해 온 견훤은 거창에서 왕건에게 크게 대패하였습니다. 백제의 수도로 돌아온 견훤은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아들 신검은 아버지가 다음 왕위 계승자로 동생을 총애한 것에 불만을 품고 견훤을 감옥에 투옥하여 반란에 직면하게 됩니다.
왕건은 현재 경주 밖에 새로 주둔지를 만들고 이를 통해 신라가 지배하였던 대부분의 영토를 장악하였고, 932년 중국 당나라에 의해 사실상의 한반도 통치자로서 지위를 인정받았습니다. 왕건은 또 한번 백제와 운주에서 압승하여 만주 북부 발해에서 온 피난민들은 고려로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이 안정되었습니다.
신란 경순왕은 서기 935년 왕건을 후계자로 추대했고, 같은 해 후고구려 영토로 탈출한 견훤은 왕건에게 신검을 제거하기 위한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견훤은 후고구려군을 이끌고 백제로 건너갔고 견훤의 아들 신검을 죽임으로써 후백제는 멸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왕건은 신라와 후백제를 정리한 후 오늘날 한국 이름의 유래인 고려라는 이름으로 다시 통일할 수 있었습니다. 왕건은 사후 고려 태조 또는 위대한 창시자라는 칭호를 부여받아 앞으로 5세기에 걸쳐 한국을 통치할 왕조를 세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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