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의 조선시대 중기
한국역사의 조선시대 중기는 1506 ~ 1637년 사이로 보고 있다. 특히 토지제도의 혼란으로 훈구 재무대신에 의한 광대한 토지소유는 토지 분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신진사대부로부터 불만을 야기하여 사화라 불리는 비극이 여러 번 발생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신진 사림군이 관직을 그만두고 지방으로 내려가 학문에만 전념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선조가 임명되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사림이 승리합니다. 이후 한 사림은 이들 내에서 또 파벌이 생기고 대대로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대립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을 당쟁이라고 합니다. 그 결과 처음에는 지역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서원이 나중에 넓은 땅을 소유하고 당쟁의 근원지가 되어 지방 권력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중기의 정치 구도 변화
좃너시대 중기의 정치 구도 변화는 1506년 9월 2일 연산군 폭정에 반대한 성희안, 박원종, 유순정이 일으킨 중종반정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중종은 왕권을 강화하기보다는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는데 중점을 두었고, 그 대책으로 조광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밀려난 사림파 중심의 철저한 유교개혁정치를 펼쳤습니다. 그러나 조광조가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개혁적 정책은 보수 훈구파로부터 큰 반발을 샀을뿐 아니라 그를 절대적으로 믿고 지지해 온 중종까지 점차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중종은 1519년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사림파들은 살해되었습니다.(기묘사화) 이후 새로운 외척이 등장하여 중종 후기에는 크고 작은 사건이 많이 발생하여 정국이 편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1545년 명종이 조선 13대 왕이 되자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 명종을 지지하는 소윤파가 인종을 지지하는 대윤파를 공격하면서 을사사화가 발생합니다. 약 12년에 걸친 집권 후 정국은 상당히 혼란스러워졌습니다.
1567년 즉위한 선조는 이황과 이이를 비롯한 많은 사림을 임명하였습니다. 선조는 사림을 통해 약한 세력 기반을 강화하려고 했습니다. 또한 기묘사화를 통해 숙천된 조광조를 비롯한 수많은 유학자들을 복권시키고 훈구파 대신인 남곤, 윤원형 등을 대역죄로 벌을 주어 민심을 안정시켰습니다. 그러나 사림이 김효원을 지지하는 집단 동인과 심의겸을 지지하는 서인으로 나뉘어 붕당정치가 형성됩니다. 선조는 어느 한쪽 세력이 커질 것을 두려워하여 정국이 일시에 뒤바뀌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조선시대 중기의 임진왜란
조선시대 중기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인 임진왜란은 1592년에 발생합니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20만 명의 일본군을 조선에 보내 침공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제국주의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일본군의 백병전 능력과 신무기인 조총에 의해 압도되었습니다. 부산진성의 정발과 동래성의 송상현이 일본군에 의해 단기간에 붕괴되었습니다. 상주 이일과 충주 탄금대에 진을 치고 있던 신립 부대도 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의해 패하였습니다. 선조는 뚜렷한 전략 없이 수도 한양을 버리고 압록강변 의주로 피신하게 됩니다. 개전 20여 일 후 일본군은 한양으로 들어가 임진강 방어선을 통해 쉽게 평양으로 진격하여 점령하게 됩니다.
이러 기세로 의주도 점령된 가능성이 높았지만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옥포, 사천, 한산 해전에서 일본해군을 크게 격파하면서 일본군의 북직을 못하게 막았습니다. 또한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이 권율에게 크게 패하고 삼남지방에서는 조선 전역의 의병과 정부군에게 반격당했고, 명나라에서 이여성을 중심으로 한 대군이 조선으로 파견되기 시작했습니다. 명나라와 의병의 덕분으로 일본군을 점차적으로 몰아내었지만 이미 경복궁을 비롯한 모든 궁궐과 문화재가 소실된 뒤였습니다.
그러나 5년간 정전 협상이 실패한 후 1597년 일본이 다시 조선을 침략하여 정유재란이 발생했습니다. 일본군은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해군을 칠천량에서 격파했지만 명량에서는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해군에 다시 대패합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일본군의 철수 명령이 내려졌고, 7년간 이어진 임진왜란은 노량해전으로 종결되고 이순신은 전사하게 됩니다.
임진왜란 전후 복구 사업
임진왜란 전후 복구 사업은 세자 광해군에 의해 시작됩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일본과의 두 차례 전쟁 후 가난한 땅을 복원하기 위해 사림 정책을 배제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또 요새와 무기를 수리하고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병상들을 매일 훈련시키고 호적을 개편했습니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예속문서와 군기록이 불태워지고 전쟁 중에 노비, 호적 등의 문서가 소각되면서 조선 후기의 신분제도가 붕괴하게 됩니다.
또한 임진왜란 직후 정부가 곡물과 금을 지급하여 재정을 조달한 공명첩과 선무관 장교 임명장을 발부하여 재정을 충당하였습니다. 전쟁 중 호적 자료가 유실되어 일부 부유한 상인과 농민들이 가난한 양반의 족보를 사거나 위조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직후 관직을 사거나 노비에서 해방된 사람을을 광해군이 다시 환원시켜 불만이 일자, 임진왜란 전후의 역사기록을 보강하여 공이 있는 노비와 양인에게는 노역을 면하거나 관직을 내주었습니다. 전쟁 후 후유증을 줄이기 위해 전쟁 중 화재 사고를 재정비하면서 국민을 구휼하고 복무 면제 등의 조치도 이뤄졌습니다. 또한 실리를 중시하는 중립적인 외교정책을 펼치며 서서히 망하는 명나라와 이제 새롭게 떠오르는 청나라와의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친다.
그러나 광해군과 그를 지지했던 북인 사람들에게 밀려 정치에서 배제된 서인과 남인은 힘을 합쳐 권력을 장악하고 광해군을 몰아 인조를 즉위시키게 됩니다.(인조반정)